연타석 천만을 넘어 삼연타석 천만영화를 노리는 <범죄도시4>의 기세가 대단하다. 아는 맛이 무섭다는 말처럼 배우 마동석의 독보적 액션과 권선징악의 선명한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제작진은 일찌감치 시리즈를 8편까지 제작할 것이라 공언했다. 그 절반을 달려온 <범죄도시> 프로젝트는 이미 한국영화를 떠받치는 한 기둥이 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공포물 가운데 <여고괴담>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장기간 속편을 이어온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찍이 3편에서 멈추었던 <투캅스> 시리즈도 감히 넘보지 못한 장기적 과제를 <범죄도시>는 별로 어려울 것 없다는 듯 훅훅 해내고 있는 것이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거침없는 전진 뒤엔 선명하게 깔려 있는 장르적 공식이 밑바탕이 되어준다. 형사액션물과 범죄물의 혼합, 권선징악의 구도, 적절한 코미디의 배합, 후반부 대결전 등은 시리즈가 절대 놓치지 않는 공식이라 해도 좋다. 언제나 그렇듯 공식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굴되는 것이다. 이 성공적 시리즈가 있기까지 거름이 된 작품이 수없이 많다는 뜻이다.
 
주성치의 벽력선봉 포스터

▲ 주성치의 벽력선봉 포스터 ⓒ 만능영업유한공사

 
세계 영화계 주름잡던 40년 전 홍콩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을 돌아본다. 그 시절 아시아 영화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홍콩이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네 글자 제목의 홍콩영화면 아무래도 좋다는 관객이 생겨날 만큼 명작들이 줄을 이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천녀유혼> <중경삼림> 등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이 쏟아졌고, 성룡이 대표하는 액션이며 주성치의 코미디, 진한 감성이 풍겨나는 드라마와 로맨스까지 여러 장르물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 톱스타인 유덕화, 여명, 장학우, 곽부성은 4대천왕이란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했다. 밀키스를 국민음료로 만든 주윤발을 비롯해 여명과 유덕화, 장국영이 한국 CF에 얼굴을 내비칠 정도였다. 장만옥, 임청하, 왕조현 등의 인기도 대단해서 당시 중고등학생 가운데선 이들의 얼굴이 새겨진 책받침을 쓰는 이가 많았다고 전한다.
 
무튼 홍콩영화의 전성시대 속에서 번성한 수많은 장르 가운데 오늘의 <범죄도시>의 뿌리가 된 장르가 없지 않다. 특히 경찰영화는 당대 홍콩 영화산업 가운데 가장 잘 팔리는 장르라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1980년대엔 경찰 위주의 이야기가, 1990년대 들어서는 악역을 강조한 범죄물로의 분화가 이루어지며 장르물이 한 단계 진보했다는 평가까지 이어졌다. 무엇보다 홍콩영화가 자랑하던 무술액션이 장르 위에 적절히 어우러지며 세계 어디서도 흉내내지 못할 명작이 여럿 쏟아졌다.
 
홍콩식 경찰액션물의 전성기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만능영업유한공사

 
1989년 제작된 <주성치의 벽력선봉>은 홍콩 경찰액션물의 전성기에 나온 작품이다. 당대 유명배우이던 이수현이 주연하고 그가 직접 발탁한 주성치가 그와 보조를 맞춰 화제를 모았다. 경찰물에 유독 관심을 보이며 크지 않은 제작비로 거듭 경찰영화를 찍어온 이수현이다. 그의 사단이라 불리던 배우들과 함께 찍은 <벽력선봉> 또한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언제나 권선징악, 열혈경찰이 마침내 범죄자를 일망타진하는 그와 같은 이야기는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며 끊이지 않는 온천 같은 효과를 구가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홍콩 특별수사반 반장 장철주(이수현 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죄를 소탕하려는 장철주의 수사방식은 절차를 중시하는 상급자와 사사건건 충돌한다.
 
하루는 한 여성이 지나가던 남성이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고발해 경찰서에 함께 출두한다. 상황을 지켜보던 장철주는 그녀가 소매치기에 실패하면 상대 남성을 성추행범으로 무고해 빠져나가는 악질 여성범죄자란 걸 알아보지만, 상관은 딱히 증거가 없으므로 피해 여성의 증언을 존중하여 절차대로 사건을 마무리하길 선택한다. 학교 교장인 피의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여 목을 매기까지 하지만 상관은 저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한 남성이 죄를 회피한다고 몰아붙인다.
 
오늘의 <범죄도시>를 있게 한 장르의 문법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만능영업유한공사

 
장철주는 점차 상관의 눈에 어긋나게 되고, 그는 바깥을 돌며 다른 사건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 즈음 눈에 띈 것이 무장 4인조에 의해 저질러지는 강력범죄 사건들이다. 장철주는 우연히 자동차를 절도하는 좀도둑(주성치 분)을 체포해 그를 실마리로 4인조에게 접근할 기회를 잡는다. 그로부터 좀도둑과 열혈 형사반장이 한 조를 이뤄 악당에 다가서는 긴밀한 작전이 시작된다.
 
작은 사건에서 꼬리를 잡아 큰 사건에 접근하는 줄거리, 악당 중 아무개와 형사가 손을 잡고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줄거리를 우리는 영화에서 흔히 발견한다. 뿐인가. 열혈형사는 부하들에겐 존중받지만 상사에게는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수사를 막으려는 상사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는, 심지어는 상사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수사를 이어가는 형사의 모습을 형사액션물에선 쉬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범죄도시4>에서도 마약거래 어플 제작자를 추적하던 형사 마석도가 필리핀에 근거지를 둔 도박범죄 조직에 접근하는 식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또 그 조직의 핵심으로 경찰들을 인도하는 건 역시 범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장이수(박지환 분)다. 마석도의 수사가 속도를 내지 못하자 상사들은 수사를 그만두고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지시한다. 마석도가 이를 강행하려 들자 상급자는 이를 막으려 하고, 마석도는 마침내 청장실을 무단으로 찾아가 수사를 계속하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대배우 주성치의 애송이 시절을 만나다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주성치의 벽력선봉 스틸컷 ⓒ 만능영업유한공사

 
이와 같은 설정은 <범죄도시>에서 처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조금씩 통하는 방식을 채택한 결과다. 말하자면 1980년대 제작된 <벽력선봉>과 <범죄도시>가 서로 설정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다. 통하는 설정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까지 이미 공식화된 장르물의 전형을 <범죄도시>가 입은 것이다. 여기에 마동석이란 배우의 존재감과 현지화 된 몇 가지 설정이 승부수로 작용한다.
 
<벽력선봉>도 나름의 승부수가 없지 않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관객에게 익숙해진 이수현은 주성치라는 새로운 얼굴을 주연으로 발탁해 내세운다. 실제로 주성치는 이 작품 이후 청출어람이란 말을 듣게 되었으니, 이수현의 눈이 정확했다 해도 좋겠다. <벽력선봉> 이후로도 이수현은 장르를 더 새롭게 해 변화하는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경찰물에서 벗어나 범죄물로, 즉 범죄의 구조와 액션의 밀도에 집중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 형사액션물에 고스란히 반영돼 <범죄도시> 시리즈는 전부 형사인 마석도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상대 악역 캐릭터를 쌓고 범죄의 실상을 내보이는 데 집중한다.
 
요컨대 <벽력선봉>은 오늘날 형사액션물이란 장르가 만들어지기까지 필요했던 그 중간단계를 확인하기 좋은 작품이다. 주성치라는 대배우의 귀한 초창기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고, 그가 이제는 소원해진 옛 은인과 함께 합을 맞추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이수현의 홍콩 형사액션물과 주성치의 시작을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 전성기를 꽃피워낸 한국 영화판의 관객들이 지켜보는 건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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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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