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2 12:00최종 업데이트 24.04.2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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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예의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신혼 1년 차에 남편의 친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었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바다와 가까웠던 그곳은 요양원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려고 들렀던 양로원 이후 '어르신들로만 채워진 장소'는 오랜만이었다. 무념무상으로 친척들의 뒤를 따랐고 몇몇 어른의 손에는 마실 거리와 도시락이 들렸다. 외딴곳에 덩그러니 세워진 건물에 얼얼해져 눈만 껌벅이다가 어느 6인실, 침대에 앉은 한 사람을 맞닥뜨렸다.


정오의 명절, 난생처음 뵙는 할머니는 오후 한가운데 고요했다. 망부석 같은 어깨 위 얼굴에 드러난 무언가 의아한 표정. 결정적으로 그는 가족을 못 알아봤다. 그나마 남편과 닮은 시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는 것 정도. 뽀얀 뺨을 어루만지고, 말동무를 하다가 손주가 결혼했다며 어른들은 나와 남편을 그의 앞에 앉혔다. 인사를 하고 손을 잡아 드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른들은 갈 준비를 했고, 나긋하던 할머니는 주변이 일어나는 소리와 낯선 공기에 얼얼했던 나처럼 눈을 껌벅거렸다. 할머니의 눈동자와 몇 초간 마주쳤다. 그때였다.

눈물샘이 터지고 만 것이다.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만큼 가슴을 푹 찌르는 무언가에 무방비해진 기분이었다. 요양원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느꼈을 불편한 그 감정이 낯설었던 탓일까. 그날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누군가의 생활권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놀란 마음을 무분별하게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서로의 감정과 욕망을 헤아리는 상태, 동기화

생면부지의 얼굴, 따뜻한 손, 주름 사이 단정한 눈매와 벌어진 입술, 흐릿할지라도 나의 가족을 내 방식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약소하고 귀한 기척. 아이라이너 자국이 다 지워질 정도로 별안간 통곡해버린 새댁 때문에 놀랐을 할머니의 실루엣이 눈앞에 선하다.

일본 후쿠오카의 노인요양시설인 '요리아이', 여길 운영하는 무라세 다카오가 쓴 책 <돌봄, 동기화, 자유>를 읽으며 상상해 보았다. 가족이 떠난 후 할머니의 저녁 자리를. 침대 머리맡과 잠들기 전 내다봤을 창가 너머의 색채, 한 세기 가깝게 사는 사람이 꾸었을 꿈을.
 

책<돌봄, 동기화, 자유> ⓒ 다다서재

 
철없을 새댁을 어찌 느끼셨을지, 가족이 가고 난 뒤 마음이 텁텁하진 않으셨을지 골똘해지다가 그 또한 그가 마주한 어느 하루의 풍경 중 하나일 거라고, 여전히 철없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상상을 한 것인데, 이 책의 저자 무라세 다카오식으로 말하면 그 순간만큼은 어쩌면 할머니와 나는 '동기화'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동기화란 눈과 눈의 마주침, 마음과 마음이 포개지는 순간을 일컫는 것으로,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서로 위계 없이 감정과 욕망을 읽고 존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요양보호사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오랫동안 배변 활동을 하지 못한 고령자가 화장실에서 쾌변을 보았을 때, 곁에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쾌감을 얻는 찰나와 비슷한 것이다.

고령자들을 격리하는 대신에 한 사람의 인권을 떠올리기. 짜인 하루 프로그램대로 어르신들을 억지로 씻기고 단체 율동을 추게 하는 대신 쉬고 싶을 땐 쉬고, 자고 싶을 땐 잘 수 있도록 존중하기.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 총괄소장 무라세 다카오의 철칙들이다. 그는 어르신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그곳에서의 수십 년 경험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우리는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인요양시설을 만들 것입니다."

어쩌면 역설적이고도 이상적인 공간을 주창해온 그는 여전히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돌봄'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사람이다. 저자는 어른을 아이처럼 보는 태도, 즉 내려다보는 시선을 경계하며 스물다섯부터 돌봄의 현장에서 일해왔다. 그는 일터에서 고령자들의 '지금 이 순간'에 녹아들어 공명해온 베테랑이다.

고령자의 시간도 흐른다... "노쇠한 몸에 있는 약동"
 
"노쇠한 몸에는 우리에게 없는 약동이 있다. 그 약동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다.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돌봄, 동기화, 자유>(무라세 다카오) 중에서
 
치매에 안 걸리는 법, 요양원에 입소하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법이 우후죽순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시대. 그 타성에 나도 젖어 들었나 보다. 저자 특유의 정직한 문체에 반해 몰입해 읽다가도, 삶의 지혜를 일찍이 터득한 책 속 어르신들의 일화가 유머러스해서 놀라웠다.

돌봄 노동자를 묘하게 위로해주기도 하는 고령자들의 에피소드는 이 책의 백미인데, 마치 만담 같다. 노쇠에 관해 갖는 편견을 깨는 회초리 같은 문장에 멈춰 서는 대목도 이정표처럼 펼쳐진다. '늙어서 어떻게 살까?' 고심하는 세대들이 읽었으면 하는 이유다.

저자는 인지 저하증을 앓는 어르신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도약력'의 소유자라고 고쳐 쓴다. 다음은 어느 날 시설을 가출한 할아버지를 종일 찾아 저자가 발견한 순간의 일화다. 할아버지는 반나절 넘게 자신을 찾아 헤맨 끝에 포옹하려는 저자를 지나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바쁩니다."

무라세 다카오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나의 인생을 '책임'지고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그 순간을 다만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

저자는 고령자를 시설에 욱여넣어 시스템에 따를 것을 강요하는 대신, 한 개인이 본래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경청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한다. 즉, 경제의 관점으로 효율적으로 요양원을 운영하면 '버그'에 지나지 않는 개개인 고유의 삶을 묵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노쇠한 몸이 살아내는 시간을 존중하면 달리 보이는 세상을 알려주는 이 책은 노년이 누릴 자유의 당위가 담긴 보고다. 그 당위를 우리는 너무 늦지 않도록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올해 4월초, 벚꽃놀이가 열려 어우러진 요리아이 입소자들의 모습. 사진출처: 공식홈페이지(http://yoriainomori.com)

 
익숙한 동네에서 나답게 살다가 죽고 싶은 욕망을 타인 역시 갖고 있다는 걸 아는 것. 하여 고령자가 처한 노화의 시간과 리듬을 사납게 여기는 대신 종종 같이 어우러져 보는 것. 어르신의 '지독한 반복'에 장단을 맞춰 보는 것. 치매를 업보처럼 여기고 비극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명랑하게 균열을 내보는 것. 당위는 멀리에서 찾지 않아도 충분하다. 우리 모두 늙을 테니까.

저자 무라세 다카오의 이야기는 그래서 모두의 미래를 오늘로 촘촘하게 그러안는다. 치매를 예방하자고 신신당부하기보다 '치매에 걸려도 괜찮게 살 수 있는' 대안을 꾸준히 탐색한다. 그것을 자신이 일하는 현장으로 선명하게 내보인다. 어쩌면 요양시설 요리아이의 내부 모습을 하나의 길잡이로 삼을 수 있겠다.

식판 대신 밥그릇과 국그릇 있는 요양원

요리아이는 마을과 먼 곳에 있지 않으며 미니콘서트를 열어 마을 주민과의 소통을 꾀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자유롭게 카페를 드나든다. 요양시설이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 된다. 주민들은 그곳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차를 마시고 때때로 공연을 감상한다.

입소자들은 억지 재활 대신 야외 데크를 거닐며 광합성을 한다. 식사 시간은 더욱 특별하다. 똑같은 모양의 식판에 음식을 내지 않는다. 요리아이의 식탁이 우리의 미래가 된다면 아주 조금은 마음 놓고 늙을 수 있지 않을까.
 
"갓 지은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기본이다. 밥은 밥공기에 담고 된장국은 대접에 담는다. 그리고 접시에 반찬들이 담겨져 나온다. (중략) 노인들이 음식을 씹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믹서에 갈아 만든 음식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런 기분 나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직원이 시간에 맞춰 먹기 좋은 크기로 음식을 잘라주면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즐긴다. 그것이 요리아이에서 매일 보는 광경이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가노코 히로후미) 중에서
 
무라세 다카오는 요리아이를 지을 당시 '아무리 봐도 시설로 보이지 않는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1991년 11월, 덴쇼지라는 사찰의 다실에서 시작된 데이 서비스였던 요리아이는 오바 노부요라는 한 노인의 바람을 이루자는 운동에서부터 출발했다. 요리아이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요레요레>의 편집장인 가노코 히로후미에 따르면, 오바씨는 대소변과 오물 속에서 노년을 보낸 인물. 그는 닭장 같은 요양시설을 거부했다.
 

요리아이에 입소하여 생활 중인 한 고령자의 102세 생일 파티. 사진출처: 공식홈페이지(http://yoriainomori.com) ⓒ http://yoriainomori.com

 
'객사할 각오'를 하고 끝까지 자기다운 모습으로 생활하고자 했던 90대 오바씨를 모티브로 요리아이는 2015년 준공됐다. 그의 바람을 녹여 소독약 냄새가 나고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고령자들의 집합소 대신, 설립자들은 어르신들이 익숙히 여기는 목조 주택을 완성했다.

요리하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훤히 내다보여 수시로 소통할 수 있는 주방, 무엇보다 입소자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시하는 억압의 분위기를 지워냈다. 인적이 드문 외딴곳에 지어지거나 밀집한 상가 안에 들어선 요양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요양시설에서 일하는 동료를 저자가 독려하는 방식이다. 밤새 수시로 깨는 고령자 탓에 잠 한숨 못 자는 어린 요양보호사에게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몇 번째 일어나셨을 때 할머니를 때리고 싶었어?"

여섯 번째쯤 때리고 싶었고 저자 자신은 네 번째에 때리고 싶었으니, 조율해서 다섯 번째에 때리는 걸로 하자고 합의했다는 그의 농담섞인 답이 쉬 잊히지 않는다(당연히, 때리지는 않았다. 이는 저자 나름의 스트레스 방지법 중 하나다). 실버산업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눈금을 가늠하게 한다. 

직업윤리를 강요한다 해서 돌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정신적 한계가 늘 굳건할 순 없다. 스트레스에 몰려 종종 일어나는 학대 대신, 고령자들과 요양시설에서 일하는 전문가가 돌봄 가운데서 함께할 방책은 정말 요원한 걸까. 요양보호사, 간호사, 재활사, 간병사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내 집 같지 않은 답답한 시설에서 숨통이 막히는 고령자의 고통을 덜어내는 요양시설의 설계 기준을 다시 정립해야 할 때다.

그 전에 자문했으면 하는 한 가지가 있다. 잘살면 실버타운으로 입주하고, 못 살면 거리에서 죽을 수 있다며 한 고령자의 오늘을 단순히 '부의 척도'로 우리는 너무 손쉽게 여기진 않았는가? 흔히들 노년기를 말할 때 자산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런 습관부터 멈춰 보자. 소아기나 청소년기처럼 노년기 역시 자연스러운 생의 시기로 바라보는 연습을 권하고 싶다.

저자의 목소리를 빌려 간단한 진리를 되새겨본다. 세월을 터득한 자의 육체는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욕망이 있다. 변혁적이고 약동이 있다. 사라지기 위해 요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가는 것이다. 요양원의 존립 근거는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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