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록 누르는데 다가선 검은 그림자...
"누구세요?"

[주거침입 잔혹사 - 인트로]
영혼까지 털리는 여자의 집, '주거침입' 범죄의 실체

가장 안온해야 할 곳, '집'. 그러나 여자의 집은 자주 예외가 된다. 여성이 사는 집 담을, 문을, 창문을 넘어 침입했다는 뉴스는 끊임없이 새로고침 된다. 오마이뉴스는 그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해 2021~2022년 '주거침입' 사건 판결문 200건을 분석했다. 거기엔 '성적목적'을 위해 타인의 주거에 침입한 가해자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3·8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8편의 주거침입 잔혹사를 공개한다.[편집자말]
전 생에 걸쳐 여성의 집은 침입 당한다. 새벽,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침입 당한다. ⓒ stable diffusion
2021년 11월 어느 날, 오후 5시.

"누구세요?"

입술만 겨우 달싹였다.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그는 갑자기 비상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다 뒤돌아볼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잠시 동안 마주친 그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평일 오후 5시 이른 귀갓길.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 175cm 남짓한 그는 모자부터 신발까지 온통 시커먼 차림이었다. 불과 5분여 전, 큰 의심 없이 집이 있는 3층 버튼을 눌렀다. 그가 뒤따라 누른 버튼은 7층. '띵동- 3층입니다' 소리와 함께 오피스텔 복도를 지나 내 집 도어락 앞에 섰다.

멀리 엘리베이터에서 "7층 취소"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3층에 있는 공용 헬스장을 가나, 막연히 생각했다. 비밀번호 8자리 중 세 자리를 누르려던 찰나, 도어락 반투명 계기판에 검은 물체가 어른거렸다. 목덜미가 차갑게 식었다. 빈집에 초인종을 눌렀다. 동시에 몸을 돌렸다. "누구세요?" 질문에 대답 대신 검은 가슴팍과 마주쳤다. 그는 도망쳤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니가 살려고 그랬나 보다"라고 했다. 그날 비밀번호를 모두 누르고, 손잡이를 돌렸다면... 상상은 며칠간 꿈으로 재현됐다.

2013년 12월 어느 날, 오전 1시.

서울 서대문구의 한 여성전용 하숙집. '달그락,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반지하층 6개의 방. 복도 밖 노란 전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취업준비 스트레스로 깊은 잠에 들지 못했던 날들이었다. 부스럭 인기척에 실눈을 떴다.

회색 정장 양말, 양념갈비와 술냄새가 뒤섞인 불쾌한 공기. 빛을 등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 송장처럼 굳었다. 침입자는 침대 모서리 끝에 앉아 '푸우...' 소리를 반복했다. 부산에서 상경한 지 1년,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는 더욱.

그 짧은 시간에 나를 살릴 방법 대신 '도대체 누구지'라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침입자가 손을 뻗어 내 손끝을 만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쳤다. 비명이 나오기 직전, 그는 비틀대며 방을 나갔다. 그렇게 누운 채로 30분이 지났을까, 멍한 얼굴로 일어나 불을 켜고,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문을 두 번, 세 번 다시 잠갔다.

다음날 아침, 어떻게 열었나 싶은 마음에 오십 원짜리 동전을 열쇠 홈에 맞춘 뒤 돌려보았다. '달그락, 탁' 하고 열렸다.

1991년 8월 어느 날, 오후 7시.
"물 한 잔 주실 수 있습니까."

엄마는 그날 주거침입범의 그 한 마디를 30년 넘게 잊지 못한다. 복도식 국민주택, 여름날 주방에서 보리차를 끓이느라 창문을 열어둔 채였다.

두 살배기였던 나,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와 거실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봤을까. 초인종을 누르고 물을 얻어 마신 그는 수십 분 뒤 다시 찾아왔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주방에서 가스레인지 불을 살피고 있는 어머니 옆에 섰다. 목덜미에 과도를 겨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가 기억하는 범인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엄마의 선택은 가스레인지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주전자를 집어 드는 것이었다. 비명과 함께 눈을 질끈 감고 양은 주전자를 범인 앞으로 냅다 던졌다. 당황한 침입자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채 줄행랑쳤다.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로 울고 있는 나와, "남편 좀 불러 달라"고 울부짖는 엄마.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범인은 잡지 못했다.

도시괴담을 증명하다

▲ 주거침입 잔혹사 ⓒ DALL·E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여성인 내가 겪은 경험은 사실 특별하지 않다. 매일 사회면을 오르내리는 여성 대상 주거침입 범죄의 평범한 표본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SNS에서는 여성들이 겪는 주거침입 범죄가 마치 도시 괴담처럼 퍼져나간다. 퇴근 후 오피스텔에 돌아오니 화장실 샤워 부스에 찍혀 있는 큼지막한 손자국부터, 아파트 공동현관문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뒤에서 껴안은 괴한까지.

이는 가장 최근 통계 자료 속 숫자로 매해 갱신된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2021년 12월 발간한 중요범죄 실태(2014년~2019년 확정된 1심 성폭력 범죄 판결문 1017건 조사)에 따르면, 강도·강간 범죄 범행 장소 중 주거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62.5%로 가장 많았다.

대검찰청이 지난해 내놓은 2021년 기준 범죄 분석을 봐도, 전체 성폭력 범죄 발생 장소 비율은 주거지가 31.2%(전체 8114건 중 2529건)로 가장 높았다.

그렇다면 가해자가 성적목적을 지닌 채 여성의 집을 침입하는 사건은 한 해 몇 건이나 발생할까. 알 수 없다. 그 숫자는 대검찰청 범죄분석 통계에서 '성적목적 장소침입'(2021년 기준 548건)으로 한데 묶여 있을 뿐, '주거'로 세분화돼 있지 않다.

그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오마이뉴스>는 '여성'과 '주거침입' 키워드로 판결문을 검색했다. 그렇게 산출한 주거침입 판결문 200건(2021~2022년 판결문 기준)을 분석했다. 실제 피해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수집한 증거를 함께 확인했다.

그렇게 목도한 주거침입 현실, 대한민국 여성들의 집은 어디든 뚫려있었다. 가해자들은 대문, 창문, 공동현관문, 현관문, 마당, 계단, 베란다로 침입했다. 그들은 가스배관을 타고, 도어락 앞에 블랙박스를 달고, 건물관리인으로 마스터키를 쥐고 침입했다. 가해자는 구면이기도, 초면이기도 했다. 계획적으로 또는 무작정 침입했다. 속옷을 털렸고, 집의 안온함을 빼앗겼다. 침입에 '성적목적'이 분명해도, 단순 주거침입으로만 처벌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괴담은 현실이었고, 별다른 대책 없이 방치돼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생애주기 내내 떠도는 주거침입 도시괴담의 실체를 공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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