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지금의 이슬람 사원이 있는 가파른 달동네에 난데 없는 총성이 들렸다. 1979년 12월 12일의 일이다. 육군 참모총장이 연행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신군부가 일을 벌였다는 말이 돌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사실은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성수 감독의 기억이다.
 
영화 <아수라>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작품은 다름 아닌 44년 전 그때의 기억이 질료가 됐다. 12.12 군사반란으로 규정된 그날의 사건을 두고 김성수 감독은 "오랜 숙제를 풀어낸 기분"이라 표현했다. 극화이고 상상력을 보탰다지만, 분명한 건 이번 영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전두환, 그리고 당시 신군부 세력과 그에 맞선 소수의 군인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일 서울 삼청동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표현한 숙제라는 단어는 80학번으로서 지닌 어떤 부채의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창작자가 마땅히 지닌 문제의식 때문이었을까. 그 질문부터 해야 했다.
 
"한 줌도 안 되는 무리들이 나라를 장악"
 

ⓒ 최주혜

  
"그 총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날의 기억이 내겐 각인돼 있다. 김영삼 정권 때 하나회 척결을 과제로 내세웠을 무렵 제가 감독으로 데뷔(1993년)했는데 그 사건의 실체를 처음 접한 거지.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다. 또 세월이 더 지나 2019년 초겨울 이맘때 지금 제작사 대표가 시나리오를 줬는데 그 이야기였다. 전율이 일었다. 나름 남들보다 그 사건을 잘 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래서 자신이 없었다. 혹여나 그들의 짓을 승리의 기록인양 정당화하는 게 아닐지 싶었다."
 
제안을 고사했지만 김성수 감독은 "시나리오를 본 이후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끊임 없이 머리에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2020년 여름 무렵 용기를 내 제작사 대표를 찾았다. 몇 가지 대안을 들고 갔던 그는 곧바로 각색에 착수했다. 80학번으로 당시 20대를 보내며 패배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으로 역사의 재현이나 정치적 비판보단, 권력에 취한 사람들의 작동 원리와 그들의 생리를 아주 뼈저리게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성수 감독은 본인이 접하고 듣고 공부한 것들 보단 철저하게 그로부터 멀어지는 결단이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들을 언급해서 박제화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시점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판단했는지가 중요했다"는 이유였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게 역사가 반복된 게 있잖나. 그런 분함이 들 때마다 12.12 직전 걔들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상상한 게 있다. 유죄를 받았던 재판장에서도 신군부 세력들은 입을 다물거나 본인들을 정당화하기만 했다. 그러다 천수를 누리고 간 사람도 있다. 오히려 그들이 입을 안 열고, 잘못이 없다고 했기에 난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그려보겠다 생각한 것이지.
 
대체 어떻게 한 줌도 안됐던 무리들이 진압군을 이기고 나라를 장악했을까. 그들에게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방조하는 세력 때문일 것이다. 탐욕의 무리들은 늘 달콤한 떡고물을 흘리고 다니잖나. 명분과 신념으로 그걸 제압하려던 사람들 입장에선 희생이 따르니 하나둘 신념을 버리고 떠난 거지. 그들의 책임 회피를 잘 보여주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했고 어려웠던 게 배우 캐스팅이었다. 이미 다섯 차례 함께 한 바 있는 정우성을 진압군 수장 이태신으로 설정했고, 마찬가지로 <아수라>로 호흡을 맞췄던 황정민을 전두광으로 내정한 터였다. 두 배우 모두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영화 <헌트>에 출연한 정우성은 역할의 중복 우려가 있었고, 황정민도 캐릭터 표현에 나름 부담이 있었던 상황. 김성수 감독은 이태신의 실존 모델인 장태완 소장과는 정반대의 차갑고 이성적인 면모를 강화했고, 전두환을 모티브 삼은 전두광에겐 일말의 동정도 가지 않는 교활하고 탐욕적인 면모를 심었다.
 
"처음 시나리오의 수경사령관은 우리가 익히 아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 나오는 분(배우 김기현이 연기)처럼 불같은 면모가 강했다. 전두광도 불인데 불과 불이 맞붙는 건 재미 없을 것 같더라. 악의 무리가 포악하고 열정적이라면, 이태신은 차분하고 지조 있는 선비면 어떨까. 배우 정우성의 성격이 묻어나면 더 감정이입이 쉽고 신뢰가 갈 것 같았다.
 
수정된 시나리오 핵심은 전두광이었다. 매력적인 악당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니 황정민 배우가 걱정하지 말라더라. 악인의 끝판왕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인간적으론 유능할지 몰라도 전두광은 그 하룻밤에 영달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다른 사람들 욕망을 자극해 모두가 그의 욕망 열차에 타게 하는 인물이다. <아수라> 때도 좋았지만 2018년 그가 출연한 <리차드 3세>를 봤다. 내면이 뒤틀린 살아있는 악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3년 뒤에도 그 연극을 봤는데, 더 잘하더라. 무대를 불태워버리는 느낌이었다. 전두광을 표현할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 있는 치열함
 
두 중심 캐릭터 뿐 아닌 크고작은 배역에 맞는 배우를 찾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다. 김성수 감독이 뽑은 핵심 캐릭터는 총 68명. 캐스팅 기준은 연기력, 그것도 무대 경험이 바탕이 된 좋은 배우들이었다. 참모총장 역의 이성민, 헌병감 김성균을 비롯해, 하나회 원로 멤버들인 안내상, 염동헌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합류하게 됐다.
 
"<아수라> 때부터 제 연출방식이 리허설을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연기도 잘하고, 동선 만들기에 익숙한 무대 경험이 있는 배우들이 필요했다. <아수라> 때야 많아야 5명 정도가 한 장면에 겹치니 제가 붙잡고 설명하면 되는데 여기선 최대 서른 명이었다. 인당 2분씩만 설명해도 1시간이잖나. 그래서 빠르게 동선을 만들고 이해하는 게 필수였다. 캐스팅됐는데 못하겠다고 한 분도 많았고, 정말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정말 감사한 건 배우들, 특히 연배가 있는 분들은 본인들이 거쳐온 시대에서 중요한 사건을 영화화하는 데에 기꺼이 재능을 보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사실이었다. OTT 작품에 서울 세트장을 다 뺐겨서 우린 지방에서 촬영했거든, 정말 적은 분량을 위해 서울에서 기꺼이 내려오시는 배우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했더니 괜찮다고,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게 뜻깊다고 하셨다. 안내상 배우님도 운동권으로 워낙 유명해서 이 역할을 할까 싶었는데, 이런 영화는 본인이 해야 한다며 흔쾌히 수락하셨다. 아마 같은 마음이지 않았나 싶다."

  
 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영화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유 있는 치열함이었다. <비트> <태양은 없다> 등 청춘물로 1990년대 급부상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그는 꽤 오랜 시간 침묵하다 <감기>(2013)로 복귀했다. 하지만 흥행 실패와 평단의 혹평을 겪다가 <아수라>(2016)라는 작품으로 본인만의 인장을 분명하게 증명해냈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과 스태프 사이에서 지독하고 치열한 감독이란 세평이 생겼다고 한다.
 
"사실 늘 잘하고 싶고 치열했다. 말씀대로 1990년대 말에 제가 반짝했는데 오랜만에 복귀한 <감기>로 솔직히 천만 감독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근데 고용감독이라 시나리오를 바꿀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 이야길 다 반영해서 대박을 치고자 했는데 너무 눈치를 많이 봤더라. 이야기와 아이디어가 잘 섞이지 않았다. 감독으로서 잘 못 했다는 반성이 드는 작품이다.
 
제가 나이가 있어 앞으로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 다음에 만든다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고픈 걸 한다고 내놓은 게 <아수라>였다. 영화화되기 힘들었는데 정우성씨에게 부탁하고, 사나이픽쳐스에도 부탁하면서 겨우 만들게 됐다. 100프로 제가 원한 걸 찍은 결과물이다. 대중과 소통은 아쉬웠지만, 끝내고 나니 굉장한 포만감이 들더라. 극소수의 <아수라> 팬이 생겨서 응원해주셨고, 이번에 이렇게 기회를 얻게 됐다. 마찬가지로 제 주관적 방식과 대중과 소통이라는 두 마음이 충돌하면서 작업한 것 같다.
 
흥행 요소를 고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재밌게 보지 않는다면 역사에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 테니 9시간의 실제 사건을 예측 불가하게 변주하고자 했다. 일단 제가 재밌어야 하니까 어떤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속도감으로 휘몰아쳐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 그 자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실 정치에 발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영화에 제 생각을 표현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대로 영화는 감독의 손을 떠났다. 과연 <서울의 봄>이 영화적으로도 영화산업적으로도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까. 업계의 관심이 쏠려있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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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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