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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오래된 사진 속 손화중(孫華仲)의 얼굴은 무척 인자해 보인다. 팔짱을 끼고 선 모습에선 온화한 인품마저 느껴진다. 그의 태생지 전북 정읍 과교동을 둘러싼, 나지막해 온순해 보이는 산세를 닮아서일까. 사진에서처럼, 온화한 그의 품성이 혁명의 기틀을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의 인품은 혁명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피체되어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손화중 장군. 또렷하게 잘 생긴 얼굴에 온화한 인품이 엿보인다.
▲ 손화중 장군 피체되어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손화중 장군. 또렷하게 잘 생긴 얼굴에 온화한 인품이 엿보인다.
ⓒ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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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교동은 정읍 남쪽에서 장성을 잇는 길목이다. 고부를 빠져나와, 태생지 찾는 길을 주천삼거리 거쳐 상평동 드는 좁은 옛길로 잡았다. 주천삼거리는 정읍에서 고부나 줄포, 흥덕으로 들고나는 결절점이다. 주요 항구이던 줄포에 세곡선이 드나들던 시절, 이 삼거리는 무척 번화한 곳이었으나 이제 한적하기 그지없다.

과교동 들기 전, 9세에 이사하여 살았다는 상평동 음성 마을을 먼저 찾는다. 북으로 흐르는 정읍천과 천원천이 합수하는 자리 서쪽에 마을이 남동향으로 얌전하게 앉았다. 낮은 언덕에 기댄 집들 앞으로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 뒷산 남향받이에 손화중 단소(壇所)가 차려져 있다.
 
상평동 음성 마을 손화중 장군 단소 앞에서 본 과교동 일원. 멀리 내장산이 보인다.
▲ 음성 마을 상평동 음성 마을 손화중 장군 단소 앞에서 본 과교동 일원. 멀리 내장산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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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교동 향하는 길을 옛사람이 걸었음 직한 들판으로 잡았다. 고속도로와 철길을 건너 용산천을 따라간다. 두 물길을 합수시키는 옥녀봉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 북쪽에 과교동이 앉아 있다. 남도로 가는 갈재를 넘으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정읍남로)이 마을 한복판을 지난다. 태생지는 이 길옆 과교경로당 맞은편이다.

온화한 말투로 상대 설득... 손화중의 리더십

동학혁명 주요 인물 중 김개남은 강경파, 전봉준이 중도파라면 손화중은 온건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기질은 성장 과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이른 결혼으로 가정을 꾸렸고 20세를 전후하여 세상을 주유하며 식견을 넓히고 부패한 나라와 타락한 집권 세력을 보며 통탄의 심경을 키워간다.

공부하러 간 지리산 청학동에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대 초반부터 고향 정읍이 아닌 무장(茂長) 대접주로 활동한다. 초기엔 최시형 영향력 아래 직간접으로 연결된 호남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가급 온건한 전술을 펼치려 한 그의 행적은,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았다.

이 무렵 무장에서 그의 활동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배꼽에서 비결을 꺼낸 일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다. 이로 인해 그의 포(包)에 수많은 민중이 결합하게 된다.
 
정읍 과교동에 있는 손화중 장군 생가. 정읍에서 입암을 거쳐 장성 가는 길가에 있다.
▲ 손화중 장군 생가 정읍 과교동에 있는 손화중 장군 생가. 정읍에서 입암을 거쳐 장성 가는 길가에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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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봉기가 박원명의 회유책에 흐지부지 해산한 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그를 찾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손화중 세력이 규모는 물론 개혁 의지에서도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이 무장에서 기포(起包)한 건 이런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그의 능력에 기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조 최제우의 한을 풀고 침탈에 시달리는 농민을 구해내자는 신원 운동 당시, 손화중 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공주와 삼례집회 주축이었고 광화문 복합상소 때 한양을 벌벌 떨게 하는 혁명적 분위기를 조장한다. 보은집회 당시 어윤중(魚允中)이 양호선무사로 오게 된 배경에도 손화중 포의 역할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은집회와 달리, 가명을 사용한 전봉준이 동학 주요 지휘부로 처음 등장하는 원평집회에서도 손화중 포의 존재는 묵직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손화중은 최시형 노선에서 벗어나,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뜻을 같이하기 시작한다. 

이런 광대한 조직을 구성하게 된 힘은 그의 품성에서 말미암았다. 손화중은 누구를 만나건 온화한 말투로 반드시 그 사람을 설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온건한 품성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힘이었던 셈이다.

황현이 전봉준과 손화중을 폄훼하려 의도적으로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둘의 성정 차이만은 극명하게 엿 볼 수 있다.
 
봉준은 사로잡혀 화중과 함께 나주에 송치되었는데 화중이 (나주 목사) 민종렬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小人)'이라고 하자, 봉준은 "뭐 소인이라고, 민종렬을 보고 소인이라고 하는 너는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다.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너 같은 놈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라며 질타하였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318)
 
'밀고해 포상을 받으라' 설득 나선 일화 

허무하게 해산해버린 보은과 원평집회 후, 동학교도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각 고을 수령의 침탈은 그치지 않았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손화중 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응 방안이 제시된다. 여러 도인이 합심해, 잡혀가는 사람을 구출해내는 직접적 저항이었다. 동학사 '보은 회집' 기록을 보자.
 
도인들이 해산 귀가한 후에도 관리들의 계속되는 동학당 체포 침학(侵虐)으로 이전과 다름없이 편안히 살 수 없었다. …(중략)… 각 포와 접이 서로 단결하여 …(중략)… 잡혀가는 사람을 탈취하기로 했다. …(중략)… 동학당원이 사면에서 쏟아져 나와 포교를 물리치고 잡힌 사람을 탈취해 가는 수가 많았다. 이런 일은 충청도나 경상도 보다 전라도에서 먼저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도 접읍대접주 손화중 포에서 시작되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169에서 의역하여 인용)
 
재봉기 이후, 허술해진 틈을 타 나주와 운봉이 다시 반기를 든다. 일본군의 남해안 상륙에 대한 개연성과 첩보도 속속 들어온다. 혁명군을 진압하려는 조일 연합군의 남하 작전에도 대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은 전술을 논의한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대군을 이끌고 광주를 지키면서 후방 나주성을 경계하고 남쪽에서 올라 올 일본군을 막기로 한다.

결국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산구 선동 어등산과 용진산을 근거로 나주 민종렬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재봉기 시기를 보내게 된다. 혁명군 본진이 공주와 청주에서 패퇴하고 난 후, 장흥 석대 들판에서 펼친 마지막 전투에 손화중과 최경선 군사들이 엄청난 힘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그래서 어렵지 않다.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에 있는 손화중 장군 피체지로 전주이씨 제각이다.
▲ 손화중 장군 피체지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에 있는 손화중 장군 피체지로 전주이씨 제각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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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에 은신하던 손화중이 제각(祭閣: 묘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을 지키던 이봉우에게 자신을 돌봐줬던 은혜를 갚겠다며 '나를 밀고해 포상을 받으라'고 한 일화는, 그의 품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한 인물의 향기는 어디까지 퍼질 수 있을까

거소 터와 도소 터가 있는 고창 성송면 괴치리 찾는 길이 아늑하다. 붉은 황토와 함께 비산비야를 이룬 이곳 지형 지세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위안을 준다. 영광으로 가는 23번 국도인 고인돌대로에서 고창농악전수관이 있는 학천로에 접어든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무장읍성이다.

황토에서 자라는 곡식이 풍성해 마음마저 저절로 넉넉해진다. 거소 터가 있는 양실 마을을 먼저 찾는다. 언덕 위로 구불구불 한적한 길을 가다 큰 돌에 괴치, 사천, 양실, 주산이란 글과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으로 접어든다. 길 이름도 '손화중로'다. 바로 옆에 '손화중 유적지'라는 작은 안내판이 서 있다. 150여m 안으로 들어 삼거리에서 양실 마을로 꺾어 돈다. 1km 남짓 마을 회관이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 마을에 있는 손화중 장군 거소터. 무장 대접주로 이곳에서 동학의 큰 세력을 꾸린다.
▲ 양실 마을 거소 터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 마을에 있는 손화중 장군 거소터. 무장 대접주로 이곳에서 동학의 큰 세력을 꾸린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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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골목에 들어 수십m, 거소 터는 작은 밭이다. 손화중 거소 터임을 알리는 간판만이 흔적의 전부다. 작은 언덕에 남향받이로 앉은 집터가 포근하다. 이곳에서 혁명을 치른 셈이다. 마을 남쪽 고속도로 아래 밥사발 모양 촛대봉이 굶주렸을 당시 농민을 위로하듯 오뚝하다.

선운사로 흐르는 주진천 상류를 건너 괴치 마을로 간다. 곧다가 굽어진 2차선 포장도로를 몇 번이고 꺾어 돈다. 미륵봉이 양팔을 벌려 껴안듯 뻗은 언덕 중간에 다소곳한 괴치 마을이 앉았다. 나주, 광주를 거친 보부상이 전주로 가면서 반드시 머물렀다는, 이를테면 상업 결절부인 셈이다.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 마을에 있는 도소 터. 정읍은 물론 고창, 무장의 동학세력의 중심이 이곳이었다.
▲ 도소 터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괴치 마을에 있는 도소 터. 정읍은 물론 고창, 무장의 동학세력의 중심이 이곳이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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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소가 자리했다는 터는 어느 집 텃밭이다. 안내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주인은 터가 가진 의미에는 무관심하다는 말투다. 하기야 100년도 넘게 역적의 땅으로 애써 기억을 거세당하고 핍박받았던 시간을 반추해 보면 피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한 건지 모른다.

인품의 향기는 얼마나 멀리까지 퍼질 수 있을까. 교통과 통신을 두 발에 의지하던 시절, 손화중이라는 인물은 정읍과 고창, 무장을 아우르는 거대 세력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었을까.

순한 농민들이 그의 고매한 인품과 정신에 감화됐기 때문이리라. 탐관의 침탈에 굶어 죽으나, 한바탕 싸움으로 세상을 바꾸려다 총 맞아 죽으나 무엇이 달랐을까. 부드러운 비산비야의 이곳 지세가, 총칼보다 더 강한 손화중의 온화한 인품을 대변하고 있었다. 

태그:#손화중장군, #과교동생가, #괴치리양실, #괴치리도소, #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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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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