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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끼리의 고소와 고발은 전가의 보도다. 그들이 고소, 고발장을 들고 경찰서의 문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은 TV 뉴스의 단골 메뉴다. 대화와 타협이 본령이라는 정치가 안팎의 갈등을 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은 익숙해서인지 언뜻 당연하게 여겨진다.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은 정치인들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하는 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자초한 상황이라고 해도, 정치적 문제를 사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건 위험하다. 기실 정치가 사법부의 일탈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정상일 테다.

언제부턴가 사법 영역이 학교 교육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이는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학교가 그들에게 손 내미는 게 아니라, 교육을 불신하는 학부모들이 '자녀의 미래를 위해' 사법적 판단에 기대는 것이다. 갈등 해결에 교사는 아예 끼어들지 말라는 식이다.

학교 폭력 사안이 대표적이다. 최근 들어 학교 폭력이 발생하면, 사안의 정도와 무관하게 무조건 교육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로 이첩되는 양상을 보인다. 학교가 중간에 개입하거나 조정할 여지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심지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부로 단정해 부를 수도 없다.

'학교 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가 불러온 결과 
 
학교폭력 사안처리 절차 책자.
 학교폭력 사안처리 절차 책자.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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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바뀐 학교 폭력 사안 처리 절차를 잠깐 소개한다. 학교 폭력이 발생하면, 피해, 가해 학생을 분리하고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최초 학생 확인서'를 작성한다. 이후 사안을 교육청의 '학교 폭력 제로 센터'에 보고하면, 사안 조사를 위한 '학교 폭력 전담 조사관'이 배정된다.

그가 학교를 방문해 피해, 가해 학생과 보호자, 목격자, 담임 교사 등을 일일이 불러 면담하고 조사 보고서를 작성한다. 직후 조사한 결과를 학교 내 설치된 '학교 폭력 전담 기구'에 보고한 뒤 심의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 학교 내에서 자체 해결할지, 교육청의 '학교폭력심의위원회'로 넘길지가 결정된다.

전 과정에서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해, 가해 학생을 분리하고 진술을 확보해 교육청에 보고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관련자 모두를 불러 면담 조사하는 전담 조사관과 처분에 대해 최종적 결정 권한을 지닌 심의위원회의 몫이다. 이후 학교의 역할은 하달된 결정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올해 '학교 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가 전격 도입된 이유는 갈수록 흉포화하는 학교 폭력에 대해 전문성을 갖춘 조사관이 실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전담 조사관은 생활지도 경력이 풍부한 전직 교사나, 수사 경험이 많은 전직 경찰 출신이 대부분이다. 피해, 가해 학생과 아무런 인연이 없기에 객관적 조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든다.

무엇보다 학교 폭력 사안 처리에 시달리는 교사의 업무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다. 사안 조사부터 심의, 처벌 내용의 결정까지 모든 게 전담 조사관과 교육청의 심의위원회가 처리해야 할 일이다 보니 학교의 부담이 줄어든 건 맞다. 당장 당혹스러워하는 보호자를 상대할 일이 줄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부작용이 만만찮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학교 폭력 예방법에 의거한 법적 기구인 학교 내 '학교 폭력 전담 기구'가 유명무실해졌다고 지적한다. 전담 조사관의 보고서에 적시된 내용을 뒤집기란 애초 불가능할뿐더러 조사 결과를 추인하는 기구로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서다.

전담 조사관이 벌이는 사안 조사 자체의 한계도 뚜렷하다. 피해, 가해 학생과 보호자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적고 상충하는 부분을 재확인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일부 조사관의 경우, 양쪽 모두 조사하는 데에 채 10분도 안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환절기에 의사가 감기 환자 진료하듯 했다고 토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교사가 직접 조사하면, 피해, 가해 학생에 대한 편견이 작용할 거라는 불신 때문일 테지만, 일부 전담 조사관의 무성의한 태도에 '좋은 전담 조사관 만나는 것도 복'이라는 '웃픈' 이야기마저 나온다. 그야말로 복불복이라는 뜻이다. 정부는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된 까닭에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라고 해명한다.

불러 조사하는 번거로움은 덜었어도 학교의 난처한 상황은 과거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피해, 가해 학생의 담임 교사와 학교 폭력 담당 교사의 처지는 참으로 궁색하다. 양측 어느 쪽에서든 보호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애초 받지 않는 것이 능사라는 말까지 공공연하다.

일방을 대변하는 건 금기일뿐더러 그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심지어 응대할 때 형용사를 선택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일부 교사들은 마치 묵비권을 행사하듯 사안과 관련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학교' 폭력은 우선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이다.
ⓒ Creative Commons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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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고, 대입에 반영하도록 의무화한다는 방침은 전담 조사관 제도의 파행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처벌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학교 폭력을 줄이겠다는 취지이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이 학교마다 속출하고 있다. 학교 폭력 신고를 남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손찌검한 경우는 말할 것 없고, 친구들 보는 앞에서 욕설을 내뱉었다거나 별명을 불러 모멸감을 주었다는 이유로 신고한다. 최근엔 SNS에 자신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말을 게시했다는 걸 문제 삼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예년 같으면 금세 사과하고 화해했을 사소한 일조차 잇따라 학교 폭력 사안으로 접수되고 있다.

그나마 아이들끼리의 다툼이라면 그들에게 신뢰받는 교사와의 상담 등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지만, 보호자가 개입하는 경우엔 법적 분쟁으로 비화하는 게 다반사다. 괜히 교사가 사안에 개입했다간 책임 소재를 두고 분란에 휘말릴 수도 있다. 양쪽 보호자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며 손 떼는 게 상책이다.

실제로 피해 학생의 보호자가 지침을 악용하는 사례도 빈발한다.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어 대입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부러 강조하며, 가해 학생의 보호자에게 엄청난 액수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경우마저 있다. 합의금을 주면, 학교장 자체 해결로 마무리되도록 선처하겠다는 뜻이다.

대입에 애면글면하는 아이와 보호자에겐 경제적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일단 심의위원회에 넘겨져 처분을 받게 되면, 결정된 조치 사항을 의무적으로 생활기록부에 기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학교 폭력 사안의 '정도'와는 무관하다. 어쨌든 피해 학생과 보호자가 화해를 거부하면, 전담 조사관의 보고서에 '화해 거부'가 적시되고 무조건 심의위원회에 넘어간다.

곧, 자녀의 생활기록부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일지언정 가해 학생의 보호자는 합의금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눈에 띄는 외상이 없어도 문제 될 건 없다. 사건 이후 정신적 스트레스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하소연이면 충분하다. 병원에서 진단서 끊기란 식은 죽 먹기다.

명토 박건대, 학교 폭력은 절대 용인돼서는 안 될 범죄 행위다. 날이 갈수록 흉포화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SNS가 불쏘시개가 되어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이슈로 비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때마다 법적 처벌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학교의 예방 교육은 나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이다. '학교'에 방점을 찍는다면, 학교 폭력은 우선 교육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옳다. 현행 '학교 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와 학교 폭력 가해 기록의 대입 반영 의무화 방침은 학교 폭력 사안 해결에 교육적 방식을 아예 배제해 버렸다. 비유컨대,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학교 폭력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나치게 강퍅해졌다. 한 동료 교사는 현행 처벌 규정과 해결 절차를 두고 철저히 반교육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학교 폭력이 신고되자마자 곧장 교사의 손을 떠나게 되는 현실이라면, 학교 폭력만큼은 학교 교육을 통해 교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고백 아니냐는 그의 반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태그:#학교폭력전담조사관, #교육의사법화, #학교폭력대입반영, #학교폭력예방법, #학교폭력심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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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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