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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어완전정복>의 한 장면. 배우 이나영은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영주' 역을 연기했다.
 영화 <영어완전정복>의 한 장면. 배우 이나영은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영주' 역을 연기했다.
ⓒ 영화 <영어완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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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터는 동사무소다. 작년인가 주민자치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요새같이 먹고살기 어려운 때,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일하기는 쉽지 않다. 돈이 없어서 대학교 졸업을 못한 내가 공무원이 안 됐다면…. 그래서 늘 감사하면서 일하고자 하지만, 요새는 솔직히 민원인들이 너무 무섭다.

엊그제는 남자 직원들이 다 점심 먹으러 나갔는데 민원인 한 분이 왔다. 여직원들은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느라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는데 이분 분위기가 이상했다. 눈빛이 너무 섬뜩해서 마주치기가 겁났다. 기초생활수급자 상담을 하러 오셨다고 해서 담당자가 상담을 하는데 걱정이 돼서 건너편에서 몰래 지켜봤다.

"야, 뭘 꼬라봐! 니가 담당자야? 확 그냥!"

움찔했다. 남자 직원도 한 명 없는데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나,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안절부절 서성거리는데 몇 년 전 일이 생각났다.

그날도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있는데 한 민원인이 씩씩대며 들어왔다.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단추도 다 뜯겨져 있었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임대주택 선정에서 탈락돼 열이 잔뜩 받아서 온 것이었다. 피는 먼저 들른 주택공사 사무실 유리창을 부수는 과정에서 흘린 거였다.

그때 사회복지 업무를 보던 직원 언니는 거의 임신 막달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불안했지만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남자 직원들이 와서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주먹으로 컴퓨터를 치고 책상을 꽝꽝 때리더니 급기야는 연필꽂이를 직원 언니 머리에 집어던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떻게 말려 볼 새도 없었다. 일이 벌어진 후에야 현장 사진을 찍고 경찰을 불렀다. 성난 망아지처럼 날뛰던 민원인도 그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연필꽂이가 쓰고 있던 안경에 비껴 맞아서 큰 상처는 없었다. 만약 정통으로 맞아서 눈 주위라도 찢어졌다면, 임신한 몸이라 마취를 할 수도 없으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부랴부랴 달려온 언니 남편한테 미안해서 얼굴 들기도 힘들었다. 민원인이 와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같이 싸울 수도 없는 입장인 것이 참 원망스러웠다.

"나 '빵'에 갔다 온 사람이야... 무시하지 마!"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몇 번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터라, 조금만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민원인이 있으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몇 달 전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민원인이 칼을 품고 왔다가 의자에 내려놓고 가서 다들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다.

제일 불안한 것은 안 좋은 일이 생길 만한 분위기라도 미리 막을 수가 없다는 거다. 쫓아낼 수도 없고 끌어낼 수도 없다. 경찰을 불러도 마찬가지다. 사건이 터져야 경찰이 출동한다. 공포 분위기 조성한다고,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신고해봐야 경찰도 와서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경찰도 공무원이니까 말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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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아가씨. 남자친구 있어?"
"…."
"나 '빵'에 갔다 온 사람이야. 내가 말만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나 무시하지 마!"
"네."

벌써 20분 가까이 붙잡혀 있는 후배 여직원을 어떻게 구해주나 신경이 곤두섰다. 설마 칼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겠지. 때리면 그냥 맞고 경찰을 부르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용기를 내서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상담 끝나신 거 같은데 서류 준비하셔서 다음에 와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죄송합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비굴하게 말했다. 불쌍해서라도 패지는 않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진짜…. 알았어. 간다고 가. 담에 또 올 테니까 그때 또 보자고. 알았어?"
"네, 들어가세요."

휴~. 살았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파왔다. 좀 더 빨리 구해주지 못해 후배한테 미안했지만 너무 무서웠다. 옆에서 지켜본 내가 이 정도니 담당자였던 후배는 얼마나 떨렸을까. 점심을 먹으면서 수다로 무서움을 털어냈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 또 일어날 수 있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날 하루는 조금만 큰소리를 내는 민원인이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뺨 맞고 협박당하고... 이래도 엄살인가요

사실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일비재하다. 여직원한테 밤길 조심하라고 한 민원인이 무서워서 남자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여직원을 집에 바래다준 일화도 있다. 흔히 말하는 '깍두기' 민원인이어서 정말 해코지를 할까 봐서였다. 흥분한 민원인한테 뺨을 맞은 여직원도 있다. 가만 보면 유독 여직원들한테 이런 일이 많이 생긴다.

너무 엄살떨지 말라고, 그 정도 어려움 없는 직장이 어디 있느냐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안 잘리는 게 어디냐고 말이다. 그 말도 맞다.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해도 공무원은 잘리진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인 안전만큼은 보장받았으면 하는 것이 엄살이고 불평일까. 맞지 않는 이상 어떠한 방어행동도 할 수 없어 불안하고 무섭다. 웬만하면 민원인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싶지만 엄연히 법과 지침이란 것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다. 감사에서 걸리면 신분상의 불이익이 돌아온다.

아무리 설명해도 민원인들은 무조건 해내라고 하니, 해줄 수도 없고 안 해줄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다. 결국엔 안 된다고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난다. 동사무소에도 은행처럼 청원경찰이라도 있었으면 싶다.

공무원이 해줄 수 없는 일을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떼쓰다 분에 못 이겨 욕하고 삿대질하고 주먹질하는 민원인, 어린 여직원한테는 괜히 큰소리 한 번 더치고 욕 한 번 더하는 민원인, 흉기 들고 다니는 민원인, 말보다 손부터 올라가는 민원인, 물건 집어던지는 민원인, 술 마시고 와서 행패 부리는 민원인…. 이런 민원인과는 새해에는 제발 좀 이별했으면 좋겠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6월 25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1동 주민자치센터를 방문해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6월 25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1동 주민자치센터를 방문해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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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별, #민원인,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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